top of page

2월호 주제

​경험하다, 그리고 배우다

* 데스크탑 기준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코로나19,

학교의 역할은 무엇일까

Crowd with Masks

“보건 선생님, 학부모님이 확진이시래요. 그래서 오늘 학생이 검사받는다고 하네요.”

 

​따르릉, 주말 아침 휴대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확진자 동거가족이 코로나 19 확진자로부터 감염될 확률은 약 20%, 그리고 증상이 있을 때 보다 잠복기일 때 전염률이 더 높다. 다행스럽게도 학생은 음성이 나왔고, 더 이상의 학교 내 감염은 없었다. 운이 좋았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 지역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 19 감염증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학교는 매년 3월 입학식을 통해 설렘을 가득 안고 새로운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을 만난다. 그러나 2020년도 3월은 입학식은커녕 얼굴도 모르는 담임선생님과 출석 체크를 하고, 인터넷을 통해 학생들을 만나며 원격수업을 해나가야만 했다.

다들 처음 겪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각 과목 교과 선생님은 생방송 온라인 수업을, 영양 선생님은 급식실에서 거리 두기와 방역 소독을, 담임선생님은 각 반의 학생들의 건강 상태와 학부모님들과의 언택트 소통을, 축제 담당 선생님은 ‘언택트 축제’를 통한 학교 행사를 진행했다. 나 또한 소소하게 학생, 선생님들과 함께 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한 추억이 있다.

교육부는 유(有)증상자를 관리하기 위해 등교 및 출근하기 전 자가진단을 하는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자신의 건강을 자가진단하여 증상이 있으면 등교나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 자가 진단율을 올리려고 메시지와 단체 문자, 전화를 이용해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얼마나 열심히 홍보를 했는지 선생님 중엔 '보건 선생님 얼굴만 보면 자가진단이 떠올라요….'라는 분들과 '아, 맞다. 죄송해요. 지금 바로 할게요.' 하며 자책하는 분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왠걸, 이렇게나 노력하는데도 어쩐 일인지 자가 진단 참여율이 지지부진한 것이다.

이쯤되니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가 진단'율'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자가진단의 필요성과 당위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보건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고민한 끝에 <자가진단 캠페인>을 하기로 했다. 보건동아리 학생들은 아침 일찍 등교 시간에 교문 앞에서 며칠간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캠페인 참여 대상은 모든 학교 구성원이며, 1주일간 개인 및 학급별 자가진단 100% 달성 시 선물 증정이라는 보상도 함께 공약하였다.

결과는 엄청났다.

교직원은 약 70%이었던 자가진단율이 약 95%까지 증가하였으며, 학생들은 약 50%에서 약 80%까지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약 2주 뒤에는 자가진단율 약 100%로의 달하는 날도 오게 되었다. 참고로 교육부에서 자가진단율 100% 달성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서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골머리를 앓고 계셨는데, 그 덕분에 이 캠페인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주셨다.

참여율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옆 교직원 동료의 독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에게는 같은 학급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의 격려였다. 나 혼자 했다면 이루기 힘든 결과였다. 역시나 모두가 함께했기에 가능했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힘이 되어주는 마음이 이루어 낸 것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함께 힘을 합해 해결해 나가는 것이 곧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이 아닐까?

윤선경

@ddeon_0_

    불이 나는 꿈을 꿨다. 불이 나는 꿈은 처음 꾸는 것 같다. 불이 나는 꿈은 길몽이라고 한다. 점심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나의 꿈 얘기를 들은 회사 동료들은 좋은 꿈이라며 복권을 사라고 했다. 다들 박수를 치며 ‘너 잘되려나 봐.’ 하고 꺄르르 웃었다. 나도 함께 꺄르르 웃어버렸다.  

    꿈 속에서 나는 내 방이 아닌 다른 방에 있었다. 다른 방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냥 평소와 같이 이것저것 하고 있다가 내 방으로 갔는데 내 방에 있던 온풍기에서 불이나 내방이 모두 타 있었다. 방안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콘센트가 꽂혀있는 온풍기는 모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방에서 나는 혼자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방 밖을 지나가며 무심하게 한마디씩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괜찮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혼자 이게 왜 이렇게 됐지? 어떻게 하지 하며 내가 꽂아둔 게 아닌데 라고 억울해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 방에서 혼자 방을 동동 구르며 내 방에 들어오지 않으려 하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나 때문에 불이 나지 않았다고, 나의 결백을 증명하는 꿈이었다. 

 

    요즘 내가 참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작은 일에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다는 감각은 어느덧 희미해지고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도 그냥 덤덤하게 넘기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무디게 사는 편이 훨씬 편하기에 그냥 좋게 내가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많은 일에 열정을 불태우던 나는 마음속에 연기를 가득 채운 채 무엇이 문제인지 보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마음속을 봤어 

Watercolor Shape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를 탓하는 건 참 쉬운 일이다. 사실 문제 대부분은 이유가 너무나 복잡해서 뚜렷한 원인이란 게 없는 경우가 많다. 그걸 차근히 따져보고 인정하기엔 나는 늘 너무 지쳐있었고 그냥 그랬나 보지 하고 넘기기엔 그 상황을 시작점부터 정리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편하게 누군가를 탓했다. 주변인을 탓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나를 탓했다. 다른 이를 탓하는 건 나쁜 행동이니까. 내가 생각하기 싫어서 나에게 떠넘긴 잘못들은 쌓이고 쌓여 불이 났고 원래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렸다. 그 연기와 잿더미들로 이제 내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동료 선생님이 나에게 길몽이라며 꿈을 팔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천 원을 받고 꿈을 팔았다. 나의 걱정과 불안들이 가득한 마음을 파는 것 같아 불편했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팔았다. 그리고 오는 길에 그 돈으로 딸기우유를 사 먹었다.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어차피 아무도 들이지 못할 내방 그냥 내가 덤덤하게 치워야지. 이제 그 잿더미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사실 궁금해할 기력이 없다. 불난 집은 잘 된다는 미신도 있는데 이제 내 마음속을 다 정리하면 나도 나아갈 수 있겠지. 어쩌면 그 잿더미였던 것들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의 등을 밀어 줄지도 몰라. 정말 불이 나는 꿈은 길몽일지도 몰라. 

UseyH

@books_useyh94

등학생 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치를 위해 경쟁을 해야 한다는 통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꿈이 뭐라고 물어보면 ‘어떤 것을 공부하고 싶다’라거나 ‘어떤 일을 하고 싶다’라는 대답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가 아닌 내가 선택한 가치를 위해서 살고 싶었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는 여행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자유도 없이 학교에 갇혀있는데, 학교 밖, 한국 밖에 사람들은 지금 이시간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시스템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학교 밖에서 어떤 것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나의 가능성과 한계도 궁금했다. 나를 실험해보고 싶었다. 스무 살, 혼자 인도여행을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로 여행을 다니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첫 배낭여행에서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어쩌다 만난 호주인이 나랑 밥을 먹다가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 테이블 사람이랑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민망해져서 아프다는 핑계로 혼자 빠져    

나왔다. 이후에 여행을 몇 번 다녀오고 스스로 영어공부를 하다보니 일반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다. 언어라고는 모국어만 알았던 내가, 나의 발음과 한국어 직역형 영어로 거리낌 없이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매우 신기하다.

영어를 배우면서 언어는 그 나라 사람이 사고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한국어와 다른 표현법을 배우면서 다르게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 여행을 다니면서 다양한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웠고, 세계뉴스에서 나오는 이슈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겪은 크고 작은 어려움은 다시 어려움을 겪을 때 이겨낼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사회의 요구나 기준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가치를 따랐다. 나의 경험들은 모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체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생은 스케치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 하나, 시각 하나가 많아질수록 흑백이었던 스케치북을 다채롭게 꾸밀 수 있다.

수인

@eyesnosemouthears

스위스에서 만났던 프랑스 사람은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서 옐로우라고 지칭했을 때 너와 나의 피부색이 같은데 왜 옐로우냐고 물었다. 옐로우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스위스에서 만났던 쿠르드족 난민들은 그들이 핍박받고 살고 있으며, 독립을 위해 어떻게 노력하며, 자신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페루의 소방서는 국가 운영하지 않고 개인들의 자원봉사를 하고, 소방 물품이나 소방복이 개인의 사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 사람은 독일의 교육시스템에 대해 설명해줬는데, 독일에서는 성인이 돼서 대학을 가는 반, 가지 않는 반을 초등학생 때 나눈다고 했다. 만약에 대학을 가지 않는 반에 선정된 학생이 대학에 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물음에 가능은 하지만 매우 어렵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유럽 내 흑인에 대한 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런던에 왔던 파리 출신 친구에게 왜 런던으로 왔냐고 물었을 때 고국인 프랑스가 흑인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이탈리아 출신 흑인 여자친구가 백인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 발생한 조지 플루이드 사건이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도망 쳐보고, 쉬고, 길을 잃어보기를 바란다.

그래도 된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한 달간의 미국 여행을 떠나기 위해 출국장 게이트로 입장하던 순간은 아직도 지난주쯤의 일처럼 생생하다. 20킬로그램쯤 되는 거대한 캐리어를 겨우 끌고 공항까지 함께 와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들어가는 순간, 평소의 나 같지 않게 울컥하여 괜히 한 번 더 뒤돌아보았던 기억. 그렇게 장기로, 먼 곳을, 혼자 가본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여행의 계기는 시답지 않았다. 대학을 마쳤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유예하고 싶어서였다. 그야말로 도피성 여행이었다. 미국이었던 이유는 그보다 몇 년 전, 잠시 미국에 갔었던 경험이 아쉬움으로 남아서였고, 기간은 예산 안에서 버틸 수 있을 만한 시간을 셈하여 정했다. 미국 안에서도 캘리포니아주로 갔던 건 순전히 따뜻한 기후와 당시 열심히 덕질을 하던 SF 영화 <스타트렉>의 촬영지를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부터 한 달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반나절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만난 한낮의 햇살이 생경했다. 똑같은 오후, 똑같은 햇빛인데도 10시간을 날아온 것으로 20년 넘게 태어나고 자라온 익숙한 세상이 전복되어 있었다. 해석해야 하는 음성들에 둘러싸인 채,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탔다. 창 앞에 붙어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도시 외곽 주거지의 풍경을 보며 낯선 광경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해갔다.

    굴곡이 심하던 샌프란시스코의 지형, 바닷물을 머금은 잔뜩 찌푸린 흐린 하늘, 아득한 세월 그 자체인 아름드리 상록수와 눈이 마주쳐도 마주 노려보던 기러기, 살을 에는 찬 비바람, 케이블카의 덜컹거림, 숙소 밖에서 멀찍이 보였던 붉은 철제 다리, 깜짝 놀라도록 짭짤했던 클램 차우더, 인생의 쓴맛 같았던 아이리시 커피, 페리 표면에 부딪히는 하얀 포말, 해변도로 근처 군데군데 비어져 나온 야생화, 언덕 위 집들의 창으로 기우는 부드러운 노을빛. 여행 전에는 나의 목적지였던 샌프란시스코와 LA 중에 LA 일정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사막과 가까운 이국적인 기후, 할리우드가 있는 도시, 라라랜드 등 미디어를 통해 많이 접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여행 이후 돌이켜보면, 어디가 더 좋았냐는 질문에 샌프란시스코가 더 기억에 남는다고 답하게 되었다. 휴대폰 속 지도를 따라 경사를 오르내리며 감지하고 알아갔던 곳. 가파른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와 바다의 풍경을 더 많이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미디어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이 나오면 그 장면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의 가족이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이사를 왔을 때, 차가 멈춰있던 구불구불 경사로에서 라일리가 얼마나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지, 영화 <스탠바이, 웬디>에서 웬디가 건너지

dangdo

못하는 길이 왜 ‘마켓 스트리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에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맥락들이었다. 

    그 여행에서 소득은 없었다. (<스타트렉> 촬영지 관광은 잘 했다. 영화사 투어도 가봤다.)  캘리포니아의 이글거리는 햇살, 변덕스러운 기온과 바람 속에 도심과 자연을 오가며 가지고 있던 돈과 시간을 낭비하며 지냈다. 쉽게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길을 잃었다. 얼마든지 길을 잃어도 괜찮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멀리 떠나온 것이었으니까. 여행 기간 동안, 나는 내가 버리는 모든 시간과 과정을 좋아할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난 날로, 여행의 의미는 단절되지 않고 이후 나의 일상으로 이어졌다. 여행의 풍경은 영감이 되고, 추억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혼자 여행을 완결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성취였다. 여전히 나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불안해했지만, 어쨌든, 나는 미국에 갔다 와 본 사람이 되었다.

    ‘도망쳐 간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라면, 떠나간 곳이 어떤 곳이든 도망친 곳보다는 분명 나을 수 있다. 만약 도망쳐 간 곳도 별로라면 또 도망치면 된다. 도망 쳐보지 않으면 그런 판단조차 할 수 없다. 현실은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도망 쳐갈 곳 없이 막막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그 도피에서도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현실을 마주할 힘을 얻기도 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풍경을 알아보고 즐거워하는 경험은 의미가 없는가? 하나의 추억이 인간을 살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용해 보이는 행동도 우리 삶의 모습이고 몸부림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과정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나는 버거웠던 20킬로그램 정도의 캐리어를 능숙하게 끌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하루가 갔다.


퇴근길 차량에 오르며 드는 생각이다.
모처럼 비가 오는데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란 창밖을 바라보며 내리는 비를 잠시 감상하는 것뿐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다짐했던 야심찬 계획들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진 지 오래다. 
하지만 구정이 남았으니 다시 도전해 볼 기회가 남았다며 토닥인다.

 

지금 차 안에서는 타조가 날 수 있다, 없다로 논쟁 중인 6세와 7세의 대화로 긴장감이 불타오른다. 나는 오로지 타조처럼 훨훨 날아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 동료 교사에게 면접을 잘 보고 오라고 했다. 면접을 볼 땐 붙고 싶고, 붙고 난 뒤에는 그만두고 싶은 노동의 굴레를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이자를 갚아야 하니 앞으로 26년쯤 남았을까?

Watercolor Shape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황금빛 건물에 출근하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어렸을 적이라 해도 고작 20년 전이다. 현재 나는 동네 마실 나가듯 가방도 없이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으로 출근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화장이라도 했지만 마스크(Mask)가 마스크(Face)가 된 후에는 민낯에 선크림이 끝이다. 집에 있는 화장품의 유통기한이 다가올까 걱정되어 주말에 가끔 화장하기도 하지만 이젠 그것마저 귀찮다.

지금 나의 꿈은 심사위원 또는 면접관이다. 견딜만한 지옥에서 탈출한 뒤 아니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나서야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기품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나의 꿈은…

허지웅과 공동집필 하는 것이다.

남편이 타조처럼 달려와서 원고를 순식간에 먹어버리면 어떡하지?

수박

@maehock82

몇 년 전 입사한 회사에서 한 직원을 만났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던 직원분은 나랑 모든 것이 달랐는데 일하고 있는 직종은 물론 성격이나 성향, 가치관 등 비슷한 구석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사람은 반대가 끌리는 건지 나는 그 직원분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고 관심이 갔다. 상대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우리는 업무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결국 회사에서 가장 친한 사이가 됐다.

그 직원분과는 호기심이 매우 많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자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전혀 상관없던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두고 도전하고자 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특히 내가 일하는 직종에 크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적극적으로 배우고 싶어하는 모습에 이끌려      

도와주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우리는 업무를 마치고 스터디를 시작하였으며 그때 서로 많은 대화를 하면서 관계를 다져갈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사회에서 만난 인연이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각자 개인의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자주 만나지도 매일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항상 나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관계이다. 어느 날은 가족보다, 친구보다 의지를 더 많이 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이 관계로 인해 나는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나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배운 방법 외에도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 나 스스로 배우게 된 것도 많다. 나이에 상관없이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고, 특히 현재보다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현재의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앞으로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 될지는 불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맺었던 많은 관계처럼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겨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고 사소한 일로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를 포함해서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자극과 힘이 되어주고 내가 상대에게 자극과 힘이 되어주었던 관계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해가 지나고 나이가 20대 중반이 되어 주변 친구들에게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나 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는 한다. 다른 일을 하고 싶은데 벌써 20대 중반이 되었기 때문에 망설여진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직원분의 이야기를 해주며 ‘벌써’가 아니라 ‘아직’ 20대 중반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아직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도전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니 도전해도 된다고 말이다. 이 관계를 통해 배운 것처럼 내 주변 친구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 앞으로도 나는 도전을 계속할 것이며 더욱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점점 기대되고 있다. 

조니

@sujeong.9

    서른 살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10대 때부터 나는 서른 살을 향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이룬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내 나이보다 인생을 조금 더 잘 알고, 정신적으로 성숙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오늘 밤의 나는 해답을 모르지만, 내일 아침의 나는 이걸 해결해줄 수 있을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20대의 마지막 날에 잠에 들었다. 동시에 왠지 내일 눈을 뜨면 무언가 달라져 있을 것 같다는 일말의 환상과 함께. 안타깝게도 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무언가가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30대를 영국 런던에서 맞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알고 보니 그런 과정도 인생 공부의 하나였음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를 받았던 학창시절과 달리, 직장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욕심을 내려놔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처음부터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하는 일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죄책감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면 날 것의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매혹되어 장장 세 달간의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혼자서 장기간으로 여러 나라를 여행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왜, 예쁘고 잘생긴 게 제일 재밌다고 하지 않는가. 예쁘고 잘생긴 풍경을 밤낮으로 보니 내 안의 엔돌핀이 지구를 뚫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다 이제는 그 풍경이 그 풍경 같다고 느낄 때였다. 지역을 떠나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람들이 품고 있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3개월간 17개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개념이 내게 강하게 박혀버렸다. 내가 믿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음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통념이라 생각했던 것이 그저 내 안의

경험과 생각이 만들어 낸 작은 믿음이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세계가 깨짐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은 매번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진짜 나에게서 온 것인지 확인하려 했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하며 쌓아 온 나만의 개똥철학이 이 진위를 판단했다. 그러다 여행을 통해 그동안 믿고 있던 나의 개똥철학이 점점 부서지고, 깨져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행은 내가 20대에 저지른 최고의 일이 되었다.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철학을 엿보며 내 세계가 깨지고 확장되는 느낌을 수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믿고 살아온 나의 세계가 와장창 깨지는 순간을 몇 번 경험한 뒤로, 나는 비로소 나를 찾아야 한다는 출처 모를 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고작 몇 개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나만의 철학으로 나를 규정짓기엔 나의 개똥철학이 너무 어설펐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오늘까지 본 내 모습에 불과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잘 안다는 착각으로 나의 한계를 설정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서른 살이 되어 달라진 것은 나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덜, 때로는 더 잘할 수 있는 그저 보통의 인간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억지스러운 특별함, 혹은 지나친 비하를 부여하지 않은 그저 보통의 인간.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네, 하는 것과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 전부가 아니라는 어쩌면 양 극단에 선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살아가는 30대를 보내기를 나는 꿈꾼다.

유빈

@xluna_yux

우리의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델타의 첫 호에 참여해주신 7분의 작가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프로젝트 델타 2월호

글쓴이 윤선경 UseyH 수인 dangdo 수박 조니 유빈 

편집자 유빈

프로젝트 델타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bottom of page